지덕사의 의미
지덕(至德)
"인격이 극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세조가 친히 지어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덕사는 조선왕조 제3대 태종대왕과 원경왕후민시의 장자로 태어나신 양녕대군(1394~1462)과 배위이신 수성부부인 광주김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과 묘소이다.
이 사당은 조선조 제19대 숙종대왕 원년에 우의정 허목의 주청으로 양녕대군의 덕망을 기리기 위하여 어명으로 세워졌다. 본래 숭례문 밖 도동에 있었는데, 1912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곳에는 중앙에 사당, 좌측에 서고와 제기고, 우측에 근세 사대의 봉사손신위를 모신 사우3동이 있다.
사당내에는 양녕대군의 친필인 후적벽부팔폭병풍 초서체목각판, 숭례문헌판탁본과 조선조 제 22대 정조대왕께서 친히 지으시고, 영의정 체제공이 어명을 받들어 쓴 금자편액의 지덕사기와 외후손 우의정, 허목의 지덕사기, 13대봉사손 충주목사 지광의 지덕사적 등 귀중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지덕사 편액은 제 22대 정조대왕 13년에 하사되었고, 글시는 어명을 받들어 지중추부사 윤동성이 썼다.
양녕대군께서 왕위를 계승할 세자로 14년 계씨면서 아우인 충녕대군에게 사양하신 행적이 고대 중국 주나라의 태백과 같다고 하여 사당의 이름을 지덕이라 명명하게 된 것이다.
양녕대군 유래
이름은 제, 자는 후백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며, 부인은 광산김씨 김한로의 딸이다. 1402년(태종2)원자로 봉해졌으며,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9년 이후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정치를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나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418년 5월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어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왕세자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후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으며, 세종과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배려로 무시했다. 시와 글씨에 매우 뛰어났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강정이다.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
그러나 부왕의 의중이 셋째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고의로 강태를 부리며 주색에 빠진다.
그러면서 자신이 동구에서 물러나면 둘째인 효녕대군이 왕권을 탐낼까봐 양녕은 효령대군을 찾아가서 나라를 위해서는 덕과 지혜가 풍부한 충녕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니, 효령은 찬성하며 불가로 귀의하고, 양녕은 동궁자를 버린 후 스스로 죄인이 되어 귀양을 떠나므로 충녕이 왕위를 올라 세종대왕이 되었다. 양녕대군은 이후 평민으로 가장하여 팔도강산을 누비며 백성들과 어울려 세월을 보냈으며 훗날에는 평민으로 가장하여 탐관오리를 색출하는 등, 벼슬을 가지지 않았으며 세종대왕을 도와 보국안민에 힘썼다.
양녕대군 시
병원설립목적
의료법인 지덕사 의료재단은 양녕대군의 유덕을 현창하기 위하여 설립된 비영리 의료법인으로써, 의료기관을 설치 운영하고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 의료기관 설치운영
- 노인요양시설 설치 및 운영
- 기타 목적달성에 필요한 부대사업
병원의 특징
1) 호텔급 최신 건물과 설비를 구비한 친환경 요양병원
2) 1인 전동침대 / 1인 전용 TV&냉장고
3) 5~6 인실로 구성된 쾌적한 병실
4) 환자 건강관리 및 요양보호서비스로 요양보호사 및 간병사 24시간 상주
5) 환자 개인별 맞춤형 의료서비스